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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3
지금은 최악이 아니다. 언제든 더 나쁜 게 올 수 있다. 이 문장을 머릿속에 현수막처럼 띄워두고 몇 년을 살았다. 아니, 언제든 더 나쁜 게 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p46
마감에 늦어도 어떻게든 책이 만들어지긴한다. 대신 마감이 늦을수록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피로도가 오르고 실수할 확률이 높아진다. 축구에서 안 좋은 패스를 주면 패스를 받는 선수가 더 뛰어야 하는 것과 같다. 나는 할 수 있는한 좋은 패스를 주는 사람이고 싶다. 해야 하는 일을 최대한 잘 하고 싶은 것뿐이다.
p59
내 삶의 관심사 중 하나는 조직과 개인의 필연적 불화다. 개인이 꿈을 이루려면 조직의 힘을 빌려야 할 때가 있다. 소방수가 되고 싶은데 자기 차를 개조해서 불을 끄고 다닐 순 없다. 어떤 개인의 자존은 자신의 직장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이 관계는 대부분 실패한다. 조직은 개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직은 그 자체로 별개의 자아다. 조직은 한번 굴러가기 시작하면 그 우두머리마저도 어쩔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힘이 생긴다. 개인이 자아를 완성시키려 스스로의 신념을 조직에 걸었을 때의 이야기는 거의 모두 비극이다. 이념으로 뭔가를 해보려 했던 20세기의 천재 몽상가들이 걸었던 길도 둘 중 하나였다. 구체제에 편입된 괴물이 되거나, 아니면 거대한 조직의 톱니바퀴에 휘말려 핏자국도 못 남기고 갈려나가거나.
p74
그런데 21세기의 양복 아저씨들은 더이상 양복을 입지 않는다. 여전히 양복적인 위아래 세계관을 유지하면서도 말이지. 양복적 세계관의 위아래는 즐기고 싶지만 양복의 불편함은 싫은 모양이다. 양복이 상징하는 구시대적 프로페셔널리즘이 싫을 수도 있고. 21세기의 여러 문제는 양복 아저씨들이 양복을 입지 않아서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p79
어쩌다 이 공항에서 이 항공기를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뭔가가 되는 것에 대해, 살아남는 것에 대해, 불꽃 같은 삶과 인덕션 레인지 같은 삶에 대해, 20세기 후반에 후딱 사라져간 젊은이들과 지금까지 살아남은 노인들에 대해.
p79
문명은 필연적으로 세상을 무균실화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p89
"시합에서는 성공할 때도 실패할 때도 있으며, 최대의 영예가 있을 때도, 거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시합의 절정에 있을 때도 불행의 밑바닥에 있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합에는 행운이나 요행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실패한다 해도 아무도 다시 도전하는 걸 만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올림피아 경기 대회가 돌아올 때까지 4년이나 기다릴 것이 아니라, 즉시 자기 자신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재기하고, 똑같은 의욕을 불태워서 시합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그리고 다시 깨지면 다시 시합하면 되는 것이며, 만일 한 번이라도 우승하면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p93
"오랜만에 돈을 받는 일을 하면서 견적서를 쓰고, 동시에 누군가의 일을 해주다보니 '이 돈 받고 이 일 하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돈을 오랫동안 안 벌다가 내 일에 가치를 매기니까 그 일이 그 돈만큼으로 보이고, 그러니까 그게 엄청 위험하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세상은 세상이고 숫자는 사진 같은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진도 현실의 모든 것을 담지는 못한다. 사진화된 정보에는 반드시 누락되는 부분이 생긴다. 세상과 숫자의 관계도 같다. 숫자는 현실의 여러 요소를 보기 쉽게 만들어준다. 괴테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대차대조표"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게 현실의 전부는 아니겠지.
p96
미군은 판단했을 뿐이다. '왜 저걸 한 명이 못하지'라고 화를 낸 게 아니라 '저건 한 명으로 안 되는 일이구나'라고. 판단을 마친 미군은 사람이라는 자원을 하나 더 써서 잉어와 연못을 살리는 방법을 택했다. 게으르고 무능한 아무개 씨가 왜 게으르고 무능한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 상황 안에서 중요한 건 잉어니까.
p102
종이책에 낭만이 있다지만 낭만만 있으면 버려질 뿐이다. 헌책방 골목에 갈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가게마다 종이책은 차오르는데 이제 사람들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방식은 너무 많다. 종이책의 라이벌은 전자책만이 아니고 서점의 경쟁자는 온라인 서점만이 아니다. 요즘은 헌책방에 가보면 외서와 전문 서적을 정말 많이 볼 수 있다. 예전 시대라면 특수한 용도때문에라도 돈을 아끼지 않고 샀을 책들이다. 헌책방의 라이벌은 알라딘과 교보문고 같은걸 훨씬 넘어선다. 이제는 아이패드, 아마존, 다음과 네이버 사전, 구글 이미지검색과 구글 스칼라까지도 대우서점과 경쟁한다. 심정적으로는 좀 슬프지만 어디가 이길지는 너무 뻔하다.
p106
앱뱅킹을 개발하고 서비스하는 사람들은 천 원짜리 열 개를 ATM에 넣다가 기계가 고장나기도 하는 부산 어딘가의 세상을 알까.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나 할까.
p110
로켓 속의 극소수는 혁신과 더 나은 세상이란 말로 손님을 홀리며 혁신적으로 돈을 벌고 자기 자신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 슈트에서 요가복으로 갈아입은 자본가들은 더 유연하게 전 세계를 상대로 수수료를 떼고 도시를 상대로 단타를 친다. 평생 길들여 신을 구두 대신 예쁜 양말처럼 금방 닳는 운동화를 팔면서 그냥 사라고 사람들을 꼬드긴다.
p112
운송기술과 정보통신기술은 속도를 올리고 요금을 낮추며 일상의 절차를 점점 줄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씩 착각을 하게 된다. 부산이 서울에서 3시간 안에 갈 정도로 가깝다는 착각. 검색창 안에 모든 정보가 다 있다는 착각. 세상이 좁아지고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착각.
아직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세상은 너무 넓다. 요가복을 입은 자본가들의 최상급 두뇌로도 계산하지 못하는 변수들이 있다. 터치스크린 뒤편 인터넷에 세상의 정보들이 모두 동기화되고 있지도 않다. 고려반점은 아직 인터넷 어느 곳에도 없다. 요가복 자본가들의 시야 바깥에는 여전히 오래된 세상이 넓게 펼쳐져 있다.
p223
종이의 미래는 어둡지 않다. 인쇄매체로의 종이의 시대가 끝나고 있을 뿐이다. 인쇄매체로의 종이도 사실은 끝나지 않았다. 양적으로 팽창하지 않을 뿐이다. 종이 기반 아트북 페스티벌인 언리미티드 에디션이 열리면 1만 명이 넘는 젋은이들이 주말 내내 모인다. 올해도 1만6,000명의 젊은이들이 현장을 찾았다. 언리미티드 에디션을 총괄하는 유어마인드 이로 대표의 말을 귀담아들을 만하다. "종이책이라는 '매력적 입체'는 사람들을 계속 끌어당길 거예요. 스마트폰 등의 디바이스도 종이책의 라이벌이 아니에요. 오히려 종이 아트북을 파는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트위터 등의 SNS를 통해 전파돼요. 기존의 업계에 비하면 우리는 아주 작은 시장이지만, 여기서 조금 더 성장할 여지는 있다고 봐요."
p224
"첫째, 더이상 가치 창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모두 바꾸는 것. 둘째, 우리 가치를 창조해낸다는 기업의 핵심 가치는 굳건히 지키는 것."
p228
취향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본은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로도 50년에 가까운 호황을 누렸다. 취향은 잉여 시간과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에 전 사회적인 취향의 풀이 생기려면 전 사회적인 호황이 반드시 필요하다.
p237
경향은 고정관념이기도 하다. 경향과 고정관념은 아무렇지도 않게 깨질 수 있다. 테이트 모던처럼 강가의 발전소가 현대 미술관이 되기도 한다. 그 판단의 주체가 누구든, 그 판단의 정황이 어땠든, 의외의 판단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p256
결국 답은 감각에 더한 꾸준함과 성실함이다. 좋은 걸 하면서 버티다보면 사람들이 그 공간에 모인다. 그러다보면 공간 자체에 힘이 생겨서 그 공간이 취향의 구심점이 된다. 시간이 걸리고 변수가 많고 억울한 일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결국엔 그 방법뿐이다.
p266
나는 대부분의 인간이 환경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 환경은 지리나 기후 등의 물리적 환경일 수도, 문화권의 분위기처럼 눈에 안 보일 수도 있다. 그게 뭐든 사람은 환경에 맞춰 삶의 모양을 만들어나간다.
p285
나는 요즘 세상에 가장 큰 문화적 자산은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이 있다면 그 공간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콘텐츠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공간이야말로 콘텐츠의 시작이자 끝이다. 극장의 무대에서 공연이라는 콘텐츠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사람들은 극장으로 가는 체험의 모든 과정을 콘텐츠화 할 수 있다. 가는 길까지 콘텐츠다. 그런 면에서 국립극장의 불편한 입지는 오히려 더 매력적일지 모른다. 좋은 공연을 보러 숲속의 큰 극장에 가는 거니까. 요즘 세상엔 그런 기분을 주는 게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p292
하지만 종이에만 있는 낭만이 있다는 말은 너무 맞다. 빈 종이에 필기구를 들고 팔을 움직여 여백을 줄여나갈 때만 생기는 자극이 있다. 그 자극에 대한 반응처럼 드는 이런저런 생각이 있다. 인터넷이 안 되니 인스타그램도 네이버 최신뉴스도 볼 수 없이 손바닥만 한 저해상 모니터만 있는 이코노미 클래스 테이블에 빈 종이를 펴보면 알게 된다. 쓴다는 행위가 어떤 자극이 되는지. 손을 움직여 문자를 만들어낼 때 얼마나 내밀한 속마음이 딸려 나오는지.
읽은 날: 2021.01.01~2021.01.02.
책모임: 2021.01.03.
제목이 마음에 들었고, 나와 같은 시간대를 다르게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같이 읽어준 친구들에게 감사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아서 줄을 많이 쳤던 것 같다. 모두 옮겨적지는 않았다.
간간이 웃음을 주는 부분들도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았고 이야기할 거리도 많았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내용을 기록.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복받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취향을 갖는다는 것이 하나의 사치일 수 있겠다는. 좋은 것이 좋은 것인줄 알려면 우선은 가져봐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면서도 어딘지 씁쓸하다.
★ 토끼님의 후기 http://komx2.egloos.com/6732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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