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8 "언니, 결혼생활은 어때요?" "굴욕적이야." 친한 후배가 물어왔을 때 그렇게 대답한 열다섯번째 여자는 놀라고 말았다. 반사적인 대답일 뿐이었는데 그 대답을 곱씹으니 불명확했던 감정들이 갑자기 명확해졌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굴욕적이야. 내 시간, 내 에너지, 내 결정을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아. 인생의 소유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 기분이야." "하지만 형부가 잘해주잖아요? 좋아 보였는데." "남편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 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했지." "당위로요?" "응. 갑자기 모두가 나에게 '해야 한다'로 끝나는 말들을 해. 성인이 되고 나서 그런 말 듣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대뜸 다시..
p10 삶이 그토록 고단한 것이니, 사람에 대한 예의는 타인의 삶이 쉬울 거라고 함부로 예단하지 않는 데 있다. 오스트리아의 문학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p11 삶이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데 있다. 타인과 함께하지 않고는 의식주 어느 것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이 사회에서 책임 있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가능한 한 무임승차가 되지 않으면서 ..
p84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p118 기억력이 나쁜 사람은 조금이라도 좋았던 일은 모조리 적어둘 필요가 있다. 인생에서 아름다웠던 일은 오직 기억하고 있는 것들 뿐이니까. p155 취향이 마이너한 건 죄가 아니다. 다만 그 취향의 결과물이 인기가 없는 건 알아서 감수해야 한다. 순전히 자기가 좋아 시작한 짓이니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는 수밖에. 만약 운이 좋아 그 취향이 더 많은 사람의 방향과 맞아 떨어져 같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크게 가슴 아파할 건 없다. 이미 충분히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p174 앞으로 몇 해나 파도를 타러 다닐 수 있을까? 십 년은 가능할까? 십 년이면 육십이 넘는데 그땐 또 뭐가 발목을 잡을지 알 수 없다...
p9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전두환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p17 현실을 현실 아닌 것으로 바꾸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눈가림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이 뛰..
p220 "잘 들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공포에 떨고 있어." p314 "미국에는 강꼬구징韓國人이나 조센징朝鮮人이라는 게 없었어. 왜 내가 남한 사람 아니면 북한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난 시애틀에서 태어났어. 우리 부모님은 조선이 분단되지 않았을 때 미국으로 갔고." p361 "일본은 절대 변하지 않아. 외국인을 절대 ..
p11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p20 선자가 열세 살이 되던 겨울날 훈이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훈이의 장례식에서 양진과 선자는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북받쳐서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젊은 미망인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일상으로 돌아가 여느 때처럼 일을 하기 시작했다. p105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없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단순히 주님을 흠모하거나 두려워하고, 주님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감정을 알아야 해.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실 게 분명하니까. 우리는 주님의 고뇌를 이해해야 하지.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겪으시네. 주님은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으시지. 그걸 아는 게 우리..
p23 "알다시피 사업계획서란 현실과의 첫만남에서 휴지조각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는 훈련 자체를 통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정신적인 안정감을 얻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알게 되는 거죠. 이 손잡이를 누르면 여기의 이것이 움직이고 저 손잡이를 누르면 저게 움직이는 거구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게 첫 단계죠." p62 똑똑함은 재능이고 친절함은 선택이죠. 재능을 얻는 건 쉽습니다. 그저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선택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의 재능에 현혹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재능이 선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p98 마틴 배런은 언제나 뉴스룸에서 더없이 중요한 점을 지적할 것입니다. "행정부는 우리와 전쟁 중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p24 성인이 되어 두려움을 느끼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별로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겁이 날 일 자체가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은 어떻게든 해결될 터이고 사소한 일에 몰두해봤자 부질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젊은 시절 끊임없는 집착과 두려움의 연속을 벗어나 넓은 시야를 갖추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이듦의 장점 중 하나다. 두려움에서 해방돼 나쁜 점이 하나 있다면 정말로 두려움을 느꼈을 때 이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철저히 체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읽은 날: 2021. 07. 10. 책모임: 2021. 08. 01. 파묻힌 거짓말의 다음 이야기! 음 시작부터 약간 충격적이었달까 그분이 그렇게 죽었을 줄은...!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두근두근 이런 느낌은 아니고 그래서 누군데? 누..
p540 많은 사람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영원하다고 믿고 산다. 엄청나게 끔찍한 일, 또 엄청나게 운이 좋은 일 같은 건 늘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나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종의 거짓된 안정감 속에서 지낸다. 엄청난 성공을 누릴 기회는 기꺼이 포기했으니 신과 악마, 둘 다와 합의를 이뤘다고 착각한다. 엄청난 부를 누리지도 못하겠지만 험난한 재판에 시달릴 일도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바로 그때쯤 그런 합의가 우리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바로 눈앞에서 세상이 뒤바뀌고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그래서 더 위험해진다. 어둠은 칠흑 같은 암흑으로 변한다. 새하얀 눈과 같은 순백은 잿빛으로 변한다. 눈동자에서 죽음을 볼 때 심장을 ..
p235 우리는 흔히 성공에 대해 한 가지 요소만으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설명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중요한 일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수많은 실패 원인들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p357 나의 주된 두 가지 결론은, 기술이란 어느 영웅의 개별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누적된 행동을 통해 발전한다는 것, 그리고 기술이란 대개 어떤 필요를 미리 내다보고 발명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 이후에 그 용도가 새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p360 타이핑된 문서라면 거의 다 그렇듯이 이 책도 역시 '쿼티QWERTY 자판(윗줄 왼쪽의 여섯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타이핑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 같은 자판 배열은 1873년에 역공학의 산물로 태어났다. 즉, 온갖 수단을 다발휘하여 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