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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9
학력저하의 위기적 요소 중 하나는 앞서 설명했듯이, 아이들이 스스로 학력이 없다거나 영어단어를 모른다거나 논리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것을 조금은 자각하고 있어도 '그 사실을 특별히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나로서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 가지밖에 없다. 그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p53
문제는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사는 사람입니다"하고 자신을 설정하면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어엿한 한 사람의 선수로 시장에 참가하도록 허락된다. 이 경험이 가져다주는 짜릿한 쾌감은 매우 중요하다. 어린 아이가 한 번 이 쾌감을 맛보면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이들은 그 다음부터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선 자신을 '사는 사람'으로 설정하고, 또 누군가와 마주하는 상황이 되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소비주체로 내세울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당연히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교육 서비스를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무의식중에 선점하고자 한다. 아이들은 마치 경매에 참가한 부호들처럼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서는 교단 위의 교사를 거만하게 바라보며 속으로 말한다. "자, 당신은 뭘 팔 건데? 마음에 들면 사주지."
p65
가족 중에서 '누가 가장 집안에 보탬이 되는가'를 '누가 가장 기분이 나쁜가'로 측정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 가정의 기본 규칙이다. '불쾌함'이라는 카드를 가정에서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이 자원 배분과 결정의 순간에 가장 강력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전원이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이 불쾌하고, 가장 많은 불이익을 받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둘러싸고 패권 경쟁에 열중하게 된다. (...)
평범한 가정에서 날마다 벌어지는이 게임의 규칙은 '제일 먼저 불평을 하는 사람이 승리자'라는 것이다. 이 게임을 유아기부터 해온 아이들은 어떤 경우라도 누구보다 먼저 '피해자' 위치를 선점하려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불쾌한 일과 부딪히는데, 그 모든 일에서 '나는 불쾌함을 견디는 사람'이고, 당신은 '나를 불쾌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피해자-가해자 도식을 순간적으로 만들어낸다.
p79
내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려면 "나는 누가 뭐라해도 하나밖에 없는 존재야"라고 선언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당신의 역할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하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었을 때 비로소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진정 '자기찾기'를 하고자 한다면 타인과 무관한 존재로서의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포함한 이 네트워크는 어떤 구조이고, 이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자기를 찾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내부로 향한다.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이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자기 안에 다 있는 것처럼 말이다.
(...)
문제는 '자기 바깥에 있는 목표를 향해 행동하기보다도 개인의 흥미와 관심에 따른 행위를 더 바람직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널리 유용하다고 인지된 가치일지라도 '내 입장에서 봐서' 유용성이 확증되지 않으면 미련 없이 버린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가치를 매기는 일이 모든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다.
p83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은 어떤 일의 쓸모 있음과 없음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이 바르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쓸모가 있다고 '내'가 결정한 것은 쓸모가 있고, 쓸모가 없다고 '내'가 결정한 것은 쓸모가 없다.
p115
고립된 아이가 혼자서 학교라는 시스템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자기 가치관을 학교 시스템과 대등한 것으로 대치시킨다. "이것을 왜 배워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들이댄다. 스스로 배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면 아이는 배움을 거부한다. 이것이 자기결정이다. 배우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리스크를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사칙연산을 못하고, 알파벳을 모르고, 한자를 못 읽는다. 흥미 있는 영역에 대한 사소한 지식은 있을지라도 흥미가 없는 분야는 아예 모른다. 벌레가 파먹은 듯 의미의 구멍이 숭숭 뚫린 세상이 별로 불쾌하지 않다는 듯 살고 있다. 이렇게 아이들은 계층 하강의 리스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 이데올로기 교육의 무서운 점은, 이렇게 계층하강이 자기결정에 대한 자기책임으로 여겨지는 이상 아이들이 여기서 나름의 만족감과 높은 자기평가를 끌어내면서 계층하강이 더욱 빨라진다는 것이다.
p128
선택을 강제하면서 선택한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리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특별히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가 현실에 있고, 일정 정도 이상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으면 그것은 더 이상 부조리로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p156
지성이란 요컨대 나 자신을 시간의 흐름 속에 놓고 나의 변화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무지'의 정의도 가능하다. 무지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 자신 역시 변화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하는 사고를 뜻한다. 내가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공부로부터의 도피, 노동으로부터의 도피는 자신의 무지에 고착하는 욕망인 것이다.
(...)
교육을 '고역과 성과', '화폐와 상품', '투자와 회수'라는 비즈니스 모델로 바라보는 한 교육은 반드시 무시간 모델로 밑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소비주체는 시간 안에서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변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화폐를 투자해서 이와 등가의 상품을 손에 넣는 교환을 반복하는 한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형태는 변하지만 총액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등가교환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변화하고 성숙하는 것을 금지당하고 있는 소비주체의 숙명이다.
p161
아무데나 놓아두어도 자동적으로 기능이 향상되는 전기제품이라든가, 찬장에 넣어둔 동안 저절로 맛이 좋아지는 통조림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인간이 교육을 통해서 익히는 최고의 자질은 바로 이런 힘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자질을 향상시킬 줄 아는 능력, 교육은 이 능력을 습득시키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168
모두가 표준화되면 이제 '나'라는 것은 없어집니다. 옆 사람과 나의 차이를 측정하는 도구로 경제적 잣대밖에 없다면, '자기다움'이란 애당초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붕괴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일한 척도인 돈을 양적으로 불려서 자기붕괴를 막고자 합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한 호리에 사장의 얘기도 나왔지만, 호리에 사장의 출현은 그 징후라고 봅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여러 곳에서 비판을 했는데, 그가 한 말은 어떤 의미에서 아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가 말하는 '돈의 투명성'은 바로 표준화를 뜻합니다. 돈을 척도로 인간을 표준화해버리면 그것만으로 누구나 평가해줍니다.
p173
커뮤니케이션은 '처음에 다가온 기호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 다음 기호의 의미를 이해하는' 식으로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문장의 마지막 말을 듣고 비로소 맨 앞의 말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게 되지요. 전부 그렇습니다. 문장의 마지막 말도 맨 처음 말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문장의 마지막까지 듣고 나서 처음으로 되돌아가 맨 앞의 말의 의미를 확정하고 다시 문장 끝으로 돌아오는 식으로, 시간 속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단선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까지 가지 않으면 과거를 확정할 수 없고, 과거가 확정되지 않으면 미래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시간이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왕복하는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p177
우리가 무시간 모델에 끌리는 것은 이 모델이 많은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이죠. 이익이 없으면 인간은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증권회사에서 숫자를 잘못 입력하는 바람에 어떤 사람이 수십억 원을 벌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단 몇 분 만에 말이지요. 이런 것이 무시간 모델, 비즈니스의 전형이라고 보면 됩니다. 키보드를 몇 번 두드렸을 뿐인데 은행계좌에 10자리 숫자가 죽 늘어서는 것처럼, 입력과 거의 동시에 거대한 출력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무시간 모델, 비즈니스의 이상입니다.
이런한 짧은 시간의 활동은 인간에게 강렬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무시간적인 활동이 주는 쾌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러한 짜릿한 쾌감이 때때로 있어주지 않으면, 저 역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무시간 모델의 함정은, 우리 기분을 좋게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라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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