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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고(지금보다 더!) 미루면서 나의 미루기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 모 님이 '그것은 너만의 일이 아니다'를 강조하며 이 책을 알려주었다.

역시 나만의 일은 아니었구나!

할 일을 마냥 미루다 마감 직전에 다다라서야 쫓기듯 일을 마무리하고는 미리 준비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는 삶을 살아온지 어언.. 그저 마감병 말기라 생각했던 나는 사실은 진정한 미루기를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지금 안 하면 이제 큰일이 난다 싶을 때 첫걸음을 떼고(울면서 달립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그럼 다음에 하면 되지하는 사람, 목록을 만드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일 뿐 목록을 보면서 거기에 없는 할 일을 찾아내며 목록의 일은 최대한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이 바로 저란 말이죠.

 

하지만 미루는 것의 좋은 점은, 때를 기다리다 보면 일의 방향이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바로 결정하거나 혹은 결정한 바를 바로 진행하지 않고 슬쩍 미뤄두면 흐름이 변한다는 것이죠, 나 좋은 쪽으로.

이것이 나의 미루기에 대한 핑계 같다면 그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 ...그런 경우가 뭐 얼마나 많았겠어요.

 

 

읽으면서 이게 뭔소리여 싶기도 했지만 공감하는 점도 많고 재미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오 나같은 사람들이 많은데 심지어 천재들(?)도 이러네 하는 작은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따개비가 있다.'

 

 

 

 

p21

유머 작가인 로버트 벤츨리는 <일을 해내는 방법>이라는 에세이에서 미루기의 기본 원칙을 설명하며 진실에 성큼 다가섰다. "누구든 얼마든지 많은 양의 일을 해낼수 있다. 그 일이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면."

 

p21

우리는 저마다 해야 할 일, 반드시 해야 할 일의 목록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그 일을 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아낸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다윈과 동급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따개비가 있다.

 

p32

일 미루기를 즐기는 사람, 또는 일을 미루지만 여전히 생산적인 사람도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일을 미뤄야 생산성이 높아진다거나 마감이 코앞에 닥쳐야 일이 더 잘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직업적으로 미루기를 연구한는 심리학자들은 대개 미루기에 '단순한 시간 지연'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미루기는 '상황이 더 악화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일을 지연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일을 미룰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진정한 미루기라고 할 수 없다.

 

p37

한낮에 볼일 하나를 처리하는 20분 동안 주머니와 가방에서는 갖가지 기기가 땡땡거리고 웅웅대며 나를 부른다. 즉시 처리해야 할 급한 메시지가 있나 확인하려고 핸드폰, 태블릿, 시계를 들여다본다. 그런 행동 때문에 볼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 볼일이라는 것도 내가 원래 해야만 하는 다른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렇다면 그 원래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또한 훨씬 더 중요한 다른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자꾸만 미끄러지는 성과라는 언덕을 매일 힘들게 기어오르는 것 또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가련한 망상이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일하기 싫은 날엔 특히 더.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긴 산책을 한다. 구글맵의 위성을 이용해 뉴질랜드 남섬을 오르내리는 가상의 산책이다. 휴식이 필요하면 대략 150킬로미터마다 한 번씩 멈춰서 근처에 보이는 펍이나 카페를 확대한 다음 위대한 구글이 허락한 공간을 거닐어본다. 정말 놀랍다. 오후 한나절 동안 얼마나 먼 곳까지 갈 수 있는지. 그리고 오후는 얼마나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지.

 

p56 

"미루기는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페라리가 말했다. "만성적으로 일을 미루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무능한 인간으로 여겨지기보다 노력을 안 하는 인간으로 여겨지길 바라지요."

 

p59

미루는 사람이 노력하지 않는 것은 노력이 중요한 경우 뿐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결과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그들은 더욱 절박하게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하는 것이다.

 

p79

"저는 성인께서 기도에 답해주시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답해주시지요.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누군가에게 부탁할 때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건 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지받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해요. 그러니까 이런 기도 방식은 사실 나 자신을 위한 거지요. 나쁠 것 없습니다. 아마 주님은 더 큰 문제에 대해 걱정하시겠지만......"

 

p102

리스트가 카오스와도 같은 우리의 삶을 정리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내가 리스트를 만드는 건 일을 해치우는 것과 전연 관계가 없다. 정확히 그 반대다. 나는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성취로 느껴지기 때문에, 그러므로 리스트에 적어둔 목표를 성취해야 할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같기 때문에 리스트를 좋아한다.

 

p125

드보르에게 일하지 않는 건 단순히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인 <추억>은 사포로 장정했는데, 선반에서 옆에 놓인 책들을 훼손하기 위해서였다.)

 

p178

어떠한 과정의 시작은 가장 힘겨운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희망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처음이야말로 우리가 한없는 잠재력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작가는 자신이 형편없는 글을 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힘이 쭉 빠진다. 작가는 실패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오래도록 글을 붙잡고 마무리하지 않는 한 굉장한 작품이 나올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이게 바로 일을 미루는사람들이 자기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작업 과정에 머무르는 한 완벽을 꿈꿀 수 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끝마치는 순간 그 프로젝트는 또 한 명의 불완전한 창작자가 만들어낸, 의도만 좋은 (실패한) 작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영지주의를 설파했단 버실리데스는 존재가 퇴보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오직 비존재만이 완벽을 주장할 수 있다. 무언가를 존재하게 하는 건 곧 그것을 망치는 길이다.

 

p179

그러므로 일을 미루는 사람은 과정을 늦추고 싶어 한다.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미루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진짜 목표는 목표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것을 이루어버리는 일은 오로지 가능성을 고갈시키고 한계를 설정할 뿐이다.

 

p188

같은 길을 뱅글뱅글 돌면서, 나는 감상에 푹 젖어 미루기란 일종의 상실 아닌가 생각했다. 미루기는 시간 차원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하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공간 차원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랬다, 문자 그대로 진짜 길을 잃어버렸다. 내 생각에 미루는 것과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의 차이는, 일을 미루는 사람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기로 직접 선택한다는 점이다. 미루기는 일종의 시간 여행이며, 해야 할 활동을 구체적인 현실에서 추상적인 미래로 넘겨버림으로써 시간을 조작하려는 시도다. 나의 미루기 여행은 시간 여행인 동시에 평범하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공간 여행이었다.

 

p213

망설임은 사고의 방향이 행동에서 무위 쪽으로 바뀌는 것뿐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충분히 오래 생각해보라. 그러면 대개 그 일을 꼭 할 필요는 없게 된다.

 

p236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건 무엇도 아닌 우리의 도피, 우리의 가벼운 망상과 자기기만이다. 이것들 덕분에 의무와 지배 체제에 조금이라도 덜 휘둘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 토끼님 후기  https://blog.naver.com/slimekyo/222436105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