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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하게 느끼고는 있었으나 표현할 바를 몰랐던, 차별과 불평등에서 오는 불편한 기분이 설명이 되는 것 같다.

종이책을 사서 공부하면서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묵혔다가 4개월이 지나부렀서...

근데 밑줄을 너무 많이 친 듯.

 

 

 

4%

생각해보면 차별은 거의 언제나 그렇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나서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4%

말을 한 당사자에게 이런 표현이 듣는 사람에게는 모욕적일 수도 있다고 알려준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항변한다면 더이상 문제가 아닌 걸까? 모욕을 한 사람은 없고 모욕을 당한 사람만 있으니, 모욕을 당한 쪽에서 감내하거나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걸까?

 

10%

호의와 권리에 대한 이 이른바 '명언'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무언가 베풀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은 호의로서 일을 하고 싶다. 자신이 우위에 있는 권력관계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의성(시혜성) 자선사업이나 정책은 그저 선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는 일종의 권력행위이다. 만을 당신이 권리로서 무언가 요구한다면 선을 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 권력까지 포함한다.

 

13%

문제는 이 모든 작용이 대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기울어져 있음을 생각하지 않고 평등을 찾다보면 불평등한 해법이 나오기 쉽다. 기울어진 땅에 서서 양손으로 평행봉을 들면 평행봉 역시 똑같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18%

고정관념은 일종의 착각이지만 그 영향은 꽤 강력하다. 일단 마음속에 들어오면 일종의 버그처럼 정보처리를 교란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사실에 더 집중하고 그것을 더 잘 기억한다. 결과적으로 그 고정관념을 점점 더 확신하는 사이클이 만들어진다. 반면 고정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에는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고정관념과 충돌하는 사례를 보더라도 고정관념을 바꾸지 않는다. 대신 전형적이지 않은 특이한 경우라고 여기며 예외로 치부한다. 고정관념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반증 사례를 아무리 제시해도 별 효과가 없는 이유이다.

 

28%

구조적 차별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미 차별이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충분히 예측 가능할 때, 누군가 의도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차별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생긴다. 차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불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질서정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불평등한 구조의 일부가 되어간다.

 

34%

잔혹성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엄청난 간극에서 온다고 했다. 고든 호드슨과 동료들이 연구에서 밝히듯, "농담은 농담일 뿐"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생각 자체가 사회적으로 약한 집단을 배척하고 무시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유머, 장난, 농담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누군가를 비하함으로써 웃음을 유도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조롱과 멸시를 당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놀려도 되는' 특정한 사람들에게 집중되고 반복된다. 우리가 누구를 밟고 웃고 있는지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는 이유다.

 

36%

누군가를 무언가로 호명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누군가를 향한 놀림을 '가벼운' 농담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알려준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기표가 자신에게 부착되는 경험은 소수자로서 사회적 위치와 무력한 상태를 확인시켜준다. 당신은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되고 있는가? 당신은 타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하고 있는가? 당신의 호명 권력은 어느 정도이며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37%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48%

대중을 상대로 영업을 하여 얻은 이익이 오롯이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크든 작든 기업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와 책임이 있다.

 

50%

이 와중에 '다문화아동'이라는 단어는 왜곡된 한국의 풍경을 보여준다. 다문화라는 말은 본래 다양한 문화의 상호존중과 공존을 강조하는 사상인 다문화주의에서 온 것이다. 다문화주의는 각자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 특정 문화를 우위에 놓거나 일방적으로 선을 긋고 배척하는 행동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다문화'가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진짜' 한국인이 안닌 사람을 구분하는 용어로 쓰이는 것이다.

한국인은 다문화에 속하지 않는다고 전제한 이 묘한 구도는 한국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모순된 인식구조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동등하게 존중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54%

사실 누구나 어디서든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가 있는 자리와 나의 위치에 따라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을 수없이 경험한다.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권력이다. 이 권력은 잘 쓰이면 매우 의미 있다. 권력자를 향해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시민이 권력을 획득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 여성이 남성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부하가 상사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권력관계는 기존과 달라진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상요하는 싫다는 표현은 다르다. 사장이 어떤 직원을 싫다고 말할 때, 교사가 어떤 학생을 싫다고 말할 때, 이건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며 권력관계의 변동도 아니다. 바로 권력 그 자체이다. 무수한 차별이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주류 집단이 누군가를 싫다고 지목함으로써 '낯선 것'을 솎아내는 판옵틱한 감시체제가 작동을 시작하고 공공의 공간을 통치한다.

 

56%

사람들에게는 각자 정의가 미치는 범위, 즉 정의의 범위가 있다. 누구나 정의를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미치는 영역은 한계선이 있다. 어떤 경계를 중심으로 정의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은 존중받아 마땅하고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적으로 생각되거나 비인간화되고 잔인하게 대해도 된다고 느낀다. 이들은 정의가 관장하는 도덕적 세계 밖에 존재한다.

 

63%

롤스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정당한 시민 불복종이 시민의 화합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일 경우, 그 책임은 항거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반대가 정당화되게끔 권위와 권력을 남용한 사람들에게 있다."

 

69%

집단의 차이를 무시하는 '중립'적인 접근은 일부 집단에 대한 배제를 지속시킨다. '중립'이라고 가장된 입장은 사실 주류 집단을 정상으로 상정하고 다른 집단을 일탈로 규정하며 억압하는 편향된 기준이기 때문이다.

 

71%

더군다나 지위의 유동성을 가로막는 조건들, 예컨대 성별, 인종, 민족, 장애,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등과 같은 인적 특징들은 기본적으로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요소가 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다른 능력을 남들보다 더 많이 키우라는 요구를 받는다. 여자라서, 이주민이라서, 장애인이라서, 성소수자라서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개인의 불굴의 노력으로 그 불리함을 '극복'한 성공신화를 칭송한다.

 

71%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불안하다. 아프거나 실패하거나 어떤 이유로건 소수자의 위치에 놓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조심해야 한다. 원치 안게 소수자의 위치에 놓였을 때 그 사실을 부정하며 고통을 감내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77%

적극적 조치는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언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적극적 조치는 특정 집단에 혜택이 돌아가도록 무언가를 한다는 점에서 종종 '우대' 조치로 불리며 오해를 사곤 한다. 그 조치가 없다면 불평등한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우대라고 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예컨대 장애인의 평등한 선거권 보장을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지만 '해야 할 것'도 있다. 기표소를 계단을 올라야 하는 장소에 배치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해당한다. '해야 할 것'은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 공보물을 만드는 것, 청각장애인을 위해 선거 관련 방송에 자막을 내보내거나 수화통역자를 두는 것, 지적장애인을 위해 이해하기 쉬운 선거 공보물을 만드는 것 등이다. 이를 위해 예산이 필요하지만 이는 우대가 아니라 평등을 위한 조치다.

 

 

 

★ 책 같이 읽은 토끼의 후기

https://blog.naver.com/slimekyo/222436098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