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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읽기

파친코 1_이민진

studioH 2021. 12. 29. 22:27

 

 

p11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p20

선자가 열세 살이 되던 겨울날 훈이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훈이의 장례식에서 양진과 선자는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북받쳐서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젊은 미망인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일상으로 돌아가 여느 때처럼 일을 하기 시작했다.

 

p105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없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단순히 주님을 흠모하거나 두려워하고, 주님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감정을 알아야 해.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실 게 분명하니까. 우리는 주님의 고뇌를 이해해야 하지.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겪으시네. 주님은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으시지. 그걸 아는 게 우리에게는 위로가 되는 거야. 우리가 홀로 고통받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 게 말일세."

 

p236

요셉은 이삭을 풀어주기만 한다면 경찰서 바닥에 배를 대고 기어갈 수도 있었다. 용감한 사무엘 형이었다면 대담하고도 위엄 있게 경찰에게 맞섰겠지만 요셉은 자신이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경찰이 뇌물을 요구했더라면 더 많은 돈을 빌리고 집이라도 팔았을 것이다. 요셉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뭔가 더 위대한 이상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살아남아 가족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p266

일본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일본 정부는 패배했음을 알면서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전쟁이 쉼 없이 계속되었다. 요셉의 사장인 시마무라의 아들들도 일본을 위해 전쟁터로 나갔다. 만주로 간 큰아들은 지난해에 다리 한 쪽을 잃은 후 괴저로 사망했고, 작은아들이 난징으로 가서 그 빈자리를 채웠다. 시마무라는 지나가는 말로 일본이 중국을 안정시키고 평화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에 있다고 했지만, 말투로 봐서는 시마무라도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한층 더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머지않아 유럽의 전쟁에서 독일과 동맹을 맺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일들이 요셉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요셉은 일본인 사장이 전쟁 이야기를 할 때 시기적절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긍정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사장이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마땅한 행동이었으니까. 요셉이 아는 모든 조선인들은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본의 확장 전쟁을 무의미한 짓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중국은 조선이 아니었다. 중국은 백만 명을 잃어도 계속 버틸 수 있었다. 땅덩어리가 조금 떨어져 나가도 다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나라였다. 조선인들이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하지만 일본의 적이 이긴다면 조선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 밥그릇이나 잘 챙기자는 것이 조선인들이 남몰래 품고 있는 속마음이었다. 가족을 구하고, 자기 배를 채우고, 관리자들을 경계하자. 조선의 독립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셋길을 열어주자. 적응해서 살자. 이만큼 간단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모든 애국자나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재수 없는 조선인 개자식이나 다들 먹고 살려고 애쓰는 만 명의 동포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결국 굶주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p271

노아는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학급 과제로 가족을 소개해야 했을 때는 아버지가 비스킷 공장에서 감독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몇몇 아이들이 큰아버지인 요셉이 노아의 아버지라고 생각했을 때도 아니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와 큰엄마, 심지어는 가장 좋아하는 큰아버지에게도 밝히지 않은 가장 큰 비밀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노아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온화하고 친절한 아버지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감옥에 갇히게 내버려두었다. 2년 동안 하나님은 노아의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아이들의 기도를 주의 깊게 들어주신다고 한 아버지의 말과는 달랐다.

그러나 노아가 이 모든 비밀들보다 더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은밀한 소망은 일본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카이노에 살면서 절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노아의 가장 큰 꿈이었다.

 

p341

"매일, 조선행 배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멍청이들이 가득 타지. 그런데 그와 동시에 난민들로 가득찬 배 두 척이 들어와. 조선에서 먹을 게 없어서 말이야. 조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당신보다 더 절박한 상태라고. 그들은 한 주나 지난 빵을 얻으려고 일을 해. 여자들은 이틀 굶주리고 나면 창녀가 되지. 먹여 살릴 자식들이 딸려 있으면 하루도 못 버틸걸. 당신은 지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꿈속의 고향에서 살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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