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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읽기

밤이 선생이다_황현산

studioH 2021. 12. 29. 23:56

 

p9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전두환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p17

현실을 현실 아닌 것으로 바꾸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눈가림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비겁하기 때문이다.

 

p21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p29

저마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보다 조금 앞선 자리에 특별하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끈기로 그것을 증명했다. 특별한 것은 사실 그 끈기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두텁고 불투명한 일상과 비루한 삶의 시간을 헤치고 저마다의 믿음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p40

누구나 알다시피 인간의 지식과 생각은 그것이 어떤 것이건 결국은 말로 정리되고, 말을 통해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게다가 말은 정리와 전달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생각과 지식을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발판이기도 하기에, 결국은 지식과 생각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생각이 발전하고 지식이 쌓이면 말도 발전한다.

 

p142

우리는 너무나 많은 폭력 속에 살고 있고, 그 폭력에 의지하여 살기까지 한다. 긴급한 이유도 없이 강의 물줄기를 바꿔 시멘트를 처바르고, 수수만년 세월이 만든 바닷가의 아름다운 바위를 한 시절의 이득을 위해 깨부수는 것이 폭력임은 말할 것도 없지만, 고속도로를 160킬로미터로 달리는 것도 폭력이고, 복잡한 거리에서 꼬리물기를 하는 것도 폭력이다. 저 높은 크레인 위에 한 인간을 1년이 다 되도록 세워둔 것이나, 그 일에 항의하는 사람을 감옥에 가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너는 앞자리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다. 의심스로운 것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도 폭력이며,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폭력이다.

 

p212

그는 이 패배주의 속에서 편안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아야 하고,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지녔을 능력과 재능을 깎아내려야 하고, 그래서 결국은 자기 자신을 깎아내려야 한다. 그는 정신적으로 승리하는 순간마다 실제로는 그 자신을 모욕한다.

 

p224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들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에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p227

우리는 여전히 체면을 존중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한 사람이 체면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체면에 손상되는 일을 누군가 맡아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서는 내내 어머니와 아내들이 그 천역을 감쪽같이 감당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이 경쟁사회에서 남자들이 그럴듯한 현실과 맞서 공훈을 세우는 동안, 일반 주부들은 어떤 이름도 붙어 있지 않은 자질구레한 현실, 그렇기에 가장 진정한 현실과 끝없이 실랑이를 벌여 왔다. 여자들은 얼굴을 감추는 대신 몸을 드러냈으며 그 몸으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오랫동안 삶과 생명을 유지, 관리해왔다. 그래서 여성의 익명성은 우리 생활의 사실성이 되었다.

 

p236

시는 기억술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 시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왕성했던 생명과 순결했던 마음을, 좌절과 패배와 분노의 감정을, 마음이 고양된 순간에 품었던 희망을, 내내 기억하고 현재의 순간에 용솟음쳐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p288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기계 뒤에도 사람이 있고 기계 속에도 사람이 있다. 내가 버린 쓰레기도 사람이 치워야 하고 내가 만들어내는 소음도 사람의 귀가 들어야 한다. 골짜기에 댐을 막으면 사람의 집이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개펄에 둑을 쌓으면 그만큼 사람의 생명이 흙속에 묻힌다. 사람은 큰 집에서도 살고 작은 집에서도 살고 집이 아닌 것 같은 집에서도 산다.

 

p305

어떤 사람들은 개인의 나약한 의지를 탓하고 어떤 사람들은 부조리한 제도를 고발하려 한다. 이런 진단들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진단 내지는 해답들이 저마다 하나의 시나리오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진실보다 먼저 만들어진 말들은 진실보다 시나리오를 더 사랑한다.

 

p323

물질문명의 시대란 역설적이게도 몸이 물질을 누리지 못하는 시대이다. 이제 육체가 물질을 접촉하는 순간이란 저 스냅 동작의 짧은 순간뿐이다. 우리는 어디서나 단추를 누른다. 옷을 입을 때도 옷고름을 매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서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도 위층에 올라가기 위해서도 우리는 단추를 누른다. 우리의 육체가 물질과 교섭할 때 느끼게 되는 다양한 감각들은 이제 누름단추의 탄력으로 통일된다.

 

p335

우리는 생각을 말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 생각한다. 내가 어떤 것을 한국어로 생각해서 그것을 말하거나 글로 쓸 때, 그 생각이 아무리 복잡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과 구조와 깊이는 우리말이 지니고 있는 표현역량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이 표현역량은 언어마다 다르다. 그것은 언어들 간에 상호 겹치는 부분이 있고 공유 영역을 벗어나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외국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람은 때때로 우리말의 표현역량에서 벗어나는 생각을 우리말의 표현역량 안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문제 앞에 서게 된다. 그가 이 작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말의 역량을 그 바닥까지 긁어야 하며, 이 작업이 성공했을 때 우리말은 충격을 받고 그 골격이 다소 흔들릴 수도 있다. 언어역량의 심화·발전이라는 관점에서는, 번역이 야기하는 이 충격과 요동은 번역으로 전달되는 정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