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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

삶이 그토록 고단한 것이니, 사람에 대한 예의는 타인의 삶이 쉬울 거라고 함부로 예단하지 않는 데 있다. 오스트리아의 문학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p11

삶이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데 있다. 타인과 함께하지 않고는 의식주 어느 것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이 사회에서 책임 있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가능한 한 무임승차가 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낸다는 뜻이다.

 

p57

실로, 권력은 권력자가 섣불리 권력을 휘두르는 순간부터 빛을 잃기 시작한다. 손에 권력이 있다고 해서 무례하게 굴면 조만간 줄어들기 시작하는 것이 권력이다. 날것으로 과시하면 결국 훼손되기 마련인 것이 권력이다. 폭력조차도 폭력을 진짜 휘두르기 전에 가장 강하다. '잠룡'은 아슬아슬하게 잠수하고 있을 때가 가장 매력적인 법이다. 권력을 권력의 칼집에 넣어둘 수 있는 역량이 권위를 낳는다. 권력자가 자신을 낮출 때 비로소 권위를 선물로 받는다. 권위는 권력의 가장 말랑말랑한 형태다. 권위는 권력자가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 순간 발생한다. 

 

p116

사람들이 재현을 통해 원하는 것이 진실보다는 자기 욕망의 실현이라면 이미지를 볼 때 상상해야 할 것은 재현 대상이 된 원본이 아니라 그 재현물에 묻은 욕망이다. 원본은 여기 없다.

 

p206

예술은 기성 인식체계에 맞춰 수동적으로 배열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보는 사람에게 힘을 행사한다. 예술품을 보면(견물), 마음이 일어난다(생심). 예술가는 '견물생심' 할 사물을 만드는 존재이고, 퍼포먼스를 행하는 행위예술가는 그 스스로 '견물생심' 시키는 사물이 된다. 인간은 평소에 충분히 깨어 있는 상태로 살지 않는다. 예술의 힘을 빌려 비로소 깨어난다. 예술을 인지할 때 비로소 활성화된다. 예술이라는 형식을 입고 사물은 자아에 영향을 미치고 침범한다. 바로 그 순간 인간은 물건 이상의 것, 즉 활성화되고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가 된다. 개처럼 납작하게 엎드로 있기를 그치고 진짜 존재하게 된다. 자, 이 흔들려진 자아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p210

인간은 '낳음을 당해서' 살아나간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존재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 것은 다소 실례다. 시시포스에게 왜 돌을 굴리느냐고 묻는 것이 실례이듯이. 그런 질문을 받으면 시시포스의 기분이 나빠서라기보다 돌을 굴리는 일은 운명이고, 운명을 반복하다 보면 별 생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시시포스에게 2세를 낳아 기르겠냐고 묻는 건 사정이 다르다. 그건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시포스는 새삼 자문한다. 과연 이 땅의 삶은 아이에게 권할 만한 것인가. 바로 이 근본 질문을 정부 당국자는 애써 회피한다. 왜일까? 물론, 대답하기 난감해서다.

 

p253

인간은 신이 아니고 세상은 천국이 아니다. 세상은 문제투성이고, 삶은 온전하지 않다. 당연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 그러니 세상을 문제와 답으로 재구성해볼 수 있어야 한다. 물어야 한다. 이 사태가 문제라면 답은 무엇인가? 이 사태가 답이라면 문제는 무엇인가?

 

p256

단일 원인을 찾아내어 단죄하려는 유혹은 강렬하다. 그러나 분명하고 단순한 원인을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아니, 그런 것은 없다. 어떤 문제가 오래 잔존해왔다는 것은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른 많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원인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월호 비극의 뿌리가 한국사회 전체에 산포되어 있는 것처럼, 많은 문제의 원인은 대개 해당 사회 전체에 퍼져 있다.

 

p259

여기에 쉽고 확실한 답은 없다. 오히려 쉬운 답이 있는 것처럼, 자기는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문제 뒤에 어떤 거대한 음모가가 존재하고 그 음모가만 없애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 문제의 원인만 쉽게 도려낼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 다른 사람은 무관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막연하게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퉁치는 사람, 자기는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약을 파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모든 대안은 그 나름의 부작용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사람, 일에는 비용이 따른다는 것을 감안하고 있는 사람, 기회비용까지 고려하고 있는 사람, 일시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 그러기에 다음 세대만큼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끔 양질의 선택지를 마련해주려는 사람 말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좋은 선택지는 아마 이미 소진되어버렸음을 인정하면서.

 

p261

전직 운동권들은 누구보다도 투명하게 정의를 구현하는 존재로 자임하고 그것을 동력으로 권력을 쥐었기 때문에 그들의 실패는 자칫 정의 자체의 불가능성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은 곧 한국 현대사를 지탱해오던 한 신화가 그 무능함을 드러낸다는 것, 그 신화에 기초해서 구성원들의 정열을 동원해온 서사가 불가능해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전직 운동권들의 위선이 판명된다면 그것은 다른 집단의 도덕적 무능력과는 다르다. 그 사태는 보편적 정의를 표상하는 이 사회의 능력, 공동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서사 가능성 자체에 대한 회의로 이어질 수 있다. 

 

p263

그러나 마치 오지 않을 것 같던 내일은 자연 상태에서마저 반복해서 오는 법. 앞날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을 때, 가장 난감한 것은 다음 날이 밝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다소곳하게 비참한 아침이 온다. 가끔 죽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인간은 그래도 대개 살고 싶어 하는 존재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연을 늘 들여다보지는 않은 채로, 어느 정도의 희망을 유지한 채로. 견딜 수 있는 정도로 현재를 희생해가며, 나름 긴 안목의 삶을 가꾸고 싶은 존재인 것이다. 행복한 사람이 되지는 못해도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존재인 것이다. 

 

p295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 바이러스 방역에 성공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한국이 방역에 상대적으로 성공한 것은 선진국이어서가 아니라 헬조선이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인적, 물적 자원을 갈아 넣을 수 있는 곳. (...) 헬조선에는 독한 역동성이 넘친다. 사람들은 여전히 밥을 사냥하듯이 먹고, 자신이 굴릴 돌을 앞장서 고르는 시시포스의 심정으로 직장을 고른다. 각자도생에 분투하는 동안 삶은 빨리 지나가고, 영혼은 간헐적으로나 존재한다. 

 

 

 

 

책모임: 2021. 12. 26.

 

 

올해의 마지막 책모임 책!

두근두근하면서 읽었는데 역시 재미있었다. 그 의식의 흐름이 너무 좋아(계산된 흐름일지도 모르겠지만요).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어서 좋았다. 코로나19라든지, 대선이라든지. 이전에 읽은 『밤이 선생이다(황현산)』는 '아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하는 일들이 있어서 그거대로 좋았다면 이 책은 지금 눈앞에 닥친 혹은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문제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달까. 역시 신간..!

 

교수님 근데 스포가 너무 많아요.. 아무리 고전이라도 아직 안 읽었을 수도 있잖아요?

나름의 최신작이 아니어도 미리 경고를 해주셨으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었을텐데 말이죠..

아닙니다, 아직 읽지 않았던 저의 잘못입니다....하하하 파리대왕 읽을 거에요!!!!

 

강의 들어보고 싶다. 학생으로 한 학기 수강해보고 싶다. 과제에는 자비가 없으시려나? 근데 서울대 교수님이시니깐 난 이미 글렀어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