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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읽기

옥상에서 만나요_정세랑

studioH 2022. 3. 21. 23:35

 

 

p18

"언니, 결혼생활은 어때요?"

"굴욕적이야."

친한 후배가 물어왔을 때 그렇게 대답한 열다섯번째 여자는 놀라고 말았다. 반사적인 대답일 뿐이었는데 그 대답을 곱씹으니 불명확했던 감정들이 갑자기 명확해졌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굴욕적이야. 내 시간, 내 에너지, 내 결정을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아. 인생의 소유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 기분이야."

"하지만 형부가 잘해주잖아요? 좋아 보였는데."

"남편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 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했지."

"당위로요?"

"응. 갑자기 모두가 나에게 '해야 한다'로 끝나는 말들을 해. 성인이 되고 나서 그런 말 듣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대뜸 다시."

"예를 들면요?"

"남편과 나는 같은 시험에 붙었잖아. 그런데 가족들이 내게만 '살살 다닐 직장을 들어가야 한다'고 말해.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 왜 그게 당연하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굴욕적이야."

 

p24

"어머, 임신한 거야?"

엠파이어 라인의 원피스를 입었을 뿐인데 거래처 사람이 물어왔다. 결혼하고 해를 넘기자, 여자는 그런 질문들을 자주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선을 넘는지 새삼 놀라웠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만큼 가깝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고 싶은 걸 매번 참았다. 사실 아무도, 가족도 그만큼 가깝지 않다고 여겨왔다. 여자는 타고난 개인주의자였다. 그런 여자에겐 일가친척들이 덕담이랍시고 명절마다 하는 말들이 징그럽게만 느껴졌다. 왜 다른 사람의 생식과 생식기에 대해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기이할 정도였다.

 

p25

마트 앞에서 크게 싸웠다.

"와, 홈패션 배우고 싶어. 수강료도 안 비싸고 좋다."

여자가 마트 문화센터의 수업 소개 게시판을 보다가 말했을 때, 남자가 쏘아붙였다.

"요리부터 배워."

한번은 그냥 넘어갔다.

"쉽게 하는 이탈리아 요리, 이거 배울까?"

"좀! 한식부터 매워 좀! 밑반찬부터."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둘 다 일하는데 식사 준비를 여자가 하는 건 여자의 자발적인 기여일 뿐이었다. 남자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차분하게 반박해야 했지만 여자도 쌓였던 게 많았다.

"다시 말해봐, 씨발새끼야."

격론 끝에 남자는 마트 앞에서 울었다. 여자는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p30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당신 할아버지 제사잖아? 난 만난 적도 없는 분이야. 왜 효도를 하청 주는데?"

 

p132

어쩌면 일정 퍼센트의 어린 개구리들도 그냥 죽는지 모른다. 일정 퍼센트의 낙타들도, 박쥐들도, 악어들도, 문어들도. 우리가 인간이라서 자연스러운 도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며불며 이렇듯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모든 것으로부터 한발짝 뒤로 물러서는 마음이 드는 그런 날이 있었다.

 

p150

"곶감은 먹으면 안 돼요."

"잠깐...... 햇빛, 십자가, 은, 말뚝 그런 게 아니고?"

"응, 곶감만."

"이해 안 되는데?"

"그럼 정말로 호랑이들이 곶감을 무서워했겠어요? 곶감은 전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알려진 언데드들의 독약이에요. 한때 엑소시스트들이 쓰던 성수 일부는 곶감을 담가둔 물이었다니까."

"하지만 그냥...... 말린 감이잖아."

"왜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런 거 아닐까? 죽었는데도 맛있잖아요, 곶감은. 곶감도 언데드니까 언데드가 같은 언데드를 먹으면 안 되는 그런 원리 아닐까 싶어. 광우병 비슷하게요."

 

p190

그러고보니 그 외과 교수, 어느날엔가 수업 시간에 김치국물이 묻은 가운을 입고 들어와서는 이렇게 큰 얼룩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너희는 써전이 될 자질이 없다 외치고 도로 뛰어나갔던 그 사람이었다. 알아차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지적할 수 있는 권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핵심 아닌가? 제멋대로인 괴짜였다. 나는 한국 교수들이 특별히 이상한 건지 어디나 교수들은 다 이상한 건지 궁금해졌다.

 

p212

"근데 파트너가 있으면 내가 다른 직장을 찾을 때까지 바통터치를 할 수 있잖아. 요즘 주변에 많이들 그러던데. 서로 이직할 때 버텨주고. 나는 혼자 버텨야 해. 이러다 더 아파지면...... 혼자는 서럽고 무서워."

"음, 그런 문제는 나라가 해결해줄 문제 아닌가?"

아영이 망설이다가 반문했다.

"나라는 별로 믿음이 안 가고, 40대가...... 50대가 보이질 않아. 선배들 다 어디로 사라졌지? 우리 업계는 특히 더 심해."

 

 

 

 

책모임: 2022. 03. 20. 

 

전체적으로는 재미있었고, 부분적으로는 잘 안 읽히는 글도 있었고.

 

뭔가 엄청 현실감있었던 이야기도 있었고, 뭐지 이거 괴담인가 했던 이야기도 있었고 ㅋㅋㅋㅋㅋ 저 곶감 이야기도 너무 웃겨서 큭큭거리면서 읽었다 ㅋㅋㅋㅋㅋㅋ 곶감이 언데드라니요!!!!!

 

작가의 말을 보니 이 중에 작가가 성별을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한 글도 있었는데 실제로도 남자 작가가 쓴 글일 것이라는 의견들이 많았다고 한다. 글쎄,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남자가 쓴 것 같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지만. 이미 알고 읽어서일까?

 

아, 그러고 보니 이 작가가 쓴 책 사놓고 안 읽은 게 있었네. 얼른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