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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생명체는 더 완벽하고 완전하게 성장할 수는 있어도 자기 안에 담기지 않은 것으로 자라날 수는 없다.

 

p26

사과나무는 절대 벚나무가 될 수 없지만, 사과나무나 벚나무는 타고난 체질과 환경에 따라 멋진 나무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나무한테는 축복인 습기와 햇볕이 다른 나무를 죽일 수도 있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p28

삶을 사랑하건, 다른 사람이나 동물, 꽃을 사랑하건 모든 종류의 사랑에 적용되는 기본 원칙이 있다. 내 사랑이 적절하고 상대의 욕망과 본성에 맞을 때만 나는 사랑할 수 있다. 적은 물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라면 그 식물에 대한 사랑은 필요한 만큼만 물을 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식물에 무엇이 좋은지'에 관련된 선입견이 있다면, 가령 최대한 물을 많이 주는 것이 모든 식물에 좋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식물을 해칠 것이고 죽일 것이다. 나에게는 식물이 사랑받아야 할 방식대로 식물을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사랑만 하는 것으로는, 다른 생명체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식물이, 동물이, 아이가, 남편이, 아내가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상대에게 최선인지 정한 내 선입견과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 없다면 내 사랑은 파괴적이다. 내 사랑은 죽음의 키스인 것이다.

 

p30

폭력은 자신이 강하고 우월하고 힘이 세다는 사실로 합리화된다. 하지만 이런 합리화는 얼마나 기만적인가! 실제 그 사람이 우월한 것은 그저 아이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세기 때문이다. 권총을 손에 든 남자가 다가온다면 힘세던 사람은 아이가 되고 말 것이다.

 

p34

사랑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실망을 참고 견딜 용기, 일이 잘못되어도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겠다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 사람은 자신의 강인함만 믿으면 되기 때문에 그 힘의 왜곡된 형태인 폭력을 믿을 필요가 없다.

 

p40

삶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p41

사랑은 행동, 소유, 사용이 아니라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이다.

 

p43

'팀워크'니 '집단정신'이니 하는 듣기 좋은 명칭을 아무리 가져다 붙여도 최대의 경제성을 목표로 개인을 재단해 적절한 집단 구성원 형식에 맞추려 한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개인은 능력 있고 규율을 잘 지키지만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며 온전히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기에 삶을 사랑하는 그의 능력은 마비되고 만다.

 

p49

진정한 사랑에는 타인과의 연관성과 자신의 온전함이 보존된다.

 

p54

그렇다면 20세기 익명의 권위는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시장이요 여론이며 건강한 인간 이성이다. 모두가 하는 행태이며, 남들과 같길 원하는 바람이며, 무리에서 멀어지다가는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러면서 모두는 자유의지로 행동한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인은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착각한다.

 

p55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바깥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

결국 목적이 되어버린 수단,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바꾼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제작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생산한다. 19세기에는 노예가 될지 모를 위험이 있었다면 20세기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분명 시간은 절약된다. 하지만 막상 시간을 절약해놓고는 그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워하며, 잘해봤자 시간을 죽이려 애쓸 뿐이다.

 

p59

인간은 자신, 자신의 확신, 감정을 더 이상 자기 고유의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인과 구분되지 않을 때 자신과 일치한다고 느낀다. 타인에게 순응하지 않으면 끔찍한 고독이 닥칠지도 모르며 무리에서 추방될 위험이 있다고 느낀다.

 

p64

하지만 나는 심장과 생각을 따로 떼어 별개인 양 이야기할 수 없다. 실제로 그것들은 하나이며 동일한 현상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둘을 관통하는 하나의 논리만이, 하나의 합리성 혹은 하나의 비합리성만이 존재한다.

 

p66

책을 읽고서도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면 그 책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나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p69

자기 나무나 꽃, 풍경을 보는 화가는 나무가 예쁘냐 아니냐에는 관심이 없다. 나무의 이름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훨씬 더 마음에 두는 것은 나무를 남김없이 직접 경험하는 것, 그 나무의 본질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무를 보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p70

자신을, 자신의 호불호를 타인에게 투영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훈련과 감수성, 매우 높은 객관성이 필요하다. 그에 더해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에겐 바로 그 집중력이 부족하다. 바쁘기 때문에, 동시에 모든 것을 하려고 들기 때문에 우리는 지구 역사상 가장 집중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되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신문을 읽는 동시에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또 다른 일을 한다. 실제로는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다.

 

p83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마라'는 다음 내용을 포함한다. 네가 바라는 것을 하지 말고 부모의 권위를 위해, 더 자라서는 사회의 권위를 위해 너의 의지를 꺾어라! 결국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마라'는 칼뱅주의에서 목격한 바로 그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누가 봐도 확실한 의미를 제외하면 그 문장의 뜻은 이것이다. '너를 사랑하지 마라' '너 자신이 되지 마라' '너 자신보다 중요한 것에, 너의 바깥에 있는 권력이나 그 권력의 내면화인 의무에 복종하라.'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마라'라는 문장은 인격의 자발성과 자유로운 발전을 억제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이념적 도구 중 하나가 된다.

 

p109

사랑의 조건은 혼자서도 제정신을 유지하며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자아의 강인함과 독립성, 온전함을 갖추는 것이다. 이 조건은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사랑받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사랑은 자발적 행동으로, 여기서 자발성은 말 그대로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을 말한다. 자아가 불안하고 나약하면 자기 안에 뿌리를 내릴 수 없고 사랑할 수 없다.

(...)

그러므로 사랑은 '격정'이 아니라 자기 '대상'의 행복과 발전, 자유를 위해 매진하는 능동적 노력이다. 자신의 자아가 불구가 되면 이런 열정적 긍정이 불가능하다. 진정한 긍정은 항상 강인함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가 손상되면 사랑은 양가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자아의 강한 부분으로는 상대를 사랑하지만 손상된 부분으로는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119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불안하다. 진정한 사랑과 긍정을 바탕으로 해야만 존재하는 마음의 안정을 느끼지 못한다. 항상 자신에게 몰두해야 하고 모든 것을 얻고 싶어 욕심을 부린다. 근본적으로 그의 자아에는 안정과 만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나르시시스트는 사물을 소유하는 것보다 자신을 찬양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 겉으로만 보면 이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홀딱 반한 것 같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 근본적인 자기애의 결핍을 나르시시즘과 이기심으로 보상한다. (...) 나르시시스트는 자신도 타인도 사랑하지 않는다.

 

p120

자식을 과잉보호하는 어머니이건 상대에게 과한 관심을 보이는 배우자이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항상 문제는 하나다. 그는 의식적으로는 자신이 자식이나 배우자를 특별히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다. 물론 그 적개심을 마음 깊은 곳으로 쫓아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들의 과잉 관심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존재하는 적개심을 보상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p131

다른 사람을 창의적으로 본다는 것은 투영과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어쩔 수 없이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다. 완전히 눈을 떠 내면과 바깥의 현실을 인지한다는 의미다. 그런 내면의 성숙에 이른 사람만이, 자신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의적으로 살 것이다.

 

p136

하지만 자신의 자아,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주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독창성이다. 내가 말하는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p138

타인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고 고립될 경우 나는 극심한 공포에 싸여 자기 정체감과 자기감정을 전혀 키울 수 없다. 그래서 자기 정체감 대신 나라는 인간을 소유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내 집이 내 성이다'라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내 소유물이 된다. 내 지식, 신체, 기억을 포함해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이 나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로 앞에서 말한 의미의 자기 경험이 아니다. 그럴 때 내 자기는 창의적 경험을 하는 자가 아니라 사물이자 소유물인 자신에게 집착하는 '자기'다.

 

p139

현대 교육에서는 아이에게서 갈등의 경험을 덜어주고자 한다. 뭐든 쉽게 만들어주고 모두가 아이를 정성껏 보살핀다. 윤리적 규범이 너무나 평준화되어 아이는 욕망과 규범의 갈등을 체험할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갈등은 해로운 것이기에 피해야 한다는 착각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 반대가 맞다. 갈등은 감탄의 원천이며, 자신의 힘과 흔히 '성격'이라 부르는 것을 키우는 원천이다. 갈등을피하면 인간은 마찰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된다. 어떤 격정이든 금방 가라앉고 모든 욕망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며 모든 감정이 얕아지는 기계다. 갈등은 개인적이고 우연한 종류만 있는 게 아니라 인간 실존에 깊이 뿌리내린 것도 존재한다.

 

p141

평등이란 우리 모두가 온갖 차이를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동일한 인간 존엄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우리에겐 우리의 차이를 개발할 권리가 있지만, 타인을 착취하는 데 차이를 요구하며 이용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오늘날 평등은 무리와 달라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동일이다. 차이가 평등의 원칙을 위협할 수 있다는 공포가 널리 퍼져 있다.

 

p160

무력감이 낳는 또 다른 중요한 결과는 공격을 방어할 능력을 키우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 사실 신체적 위협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능력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종류의 공격에 저항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부당하건 정당하건 자신을 향한 모든 비판을 무조건 수긍하며 반론을 펼치지 못한다. 때로 비판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방어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 온갖 모욕과 비하에도 마찬가지로 방어하지 못한다. 이 경우에도 모욕에 적절하게 대답하지 못하거나 상대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 옳고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확신해 자발적으로 모욕을 감수한다. 그러다 몇 시간 혹은 며칠이 지나서야 문득 비난이 부당했고 모욕이 지나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갑자기 상대의 비난을 반박할 온갖 논리가 떠오르고, 모욕하는 상대에게 퍼부을 수 있었을 온갖 거친 말이 떠오른다. (...) 막상 다음번에 또 그런 일이 생기면 다시 똑같이 마비되어 상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이 된다.

 

p186

최근의 대량 실업과 전쟁 위험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개인의 실질적 무력감을 더 키웠다. 아직 일할 곳이 있고 참혹한 전쟁이 또 발발하지 않았으니 매일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은 정치 경제 상황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무력함이 의도적인 원칙으로 격상된다. 하지만 민주주의국가에서도 개별 구성원이 전체의 일부로서 사회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이념은 정치 경제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개인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다.

 

p201

현대인은 점점 더 많은 소비를 바라며 끝없는 공복감에 시달린다. 그 결과 소비의 탐욕은 끝을 모르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만인이 끝없이 소비할 수 있을 만큼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소비하는 인간'의 성격 구조가 지배하는 동안에는 결코 (심리적으로 볼 때) 진정한 과잉은 불가능하다. 탐욕을 부리는 사람은 얼마를 갖고 있건 결코 충분히 얻지 못할 것이기에 항상 결핍에 시달릴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남이 가진 것은 전부 갖고 싶어 하고 남을 경쟁자로 본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혼자이고 마음 가득 불안이 넘친다. 점점 더 많이 갖고 싶기에 그는 미술을 비롯해 다른 예술의 자극을 절대 진정으로 즐길 수 없다. 그 말은 기본소득수준에서 사는 사람들은 실망과 열등감을 느끼고 그보다 더 많이 버는 사람들은 최대 소비의 간으성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상황의 포로가 된다는 뜻이다.

 

p218

소비의 문제는 가짜 자유의 문제와 묶여 있다.

 

p219

오늘날의 가짜 자유는 소비 영역에 있다. 소비자가 슈퍼마켓이나 대형 백화점에 가서 라디오, TV, 신문에서 이미 선전했던 10종의 담배를 바라본다. 모두가 그의 총애를 얻으려 애쓴다. 마치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제발 날 골라주세요!" 근본적으로는 소비자도 이 모두가 사실은 상표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럼에도 그것은 그에게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의 감정을 선사한다. (...) 바로 그 가짜 선택을 통해 가짜 인성이 된다. (...) 그것이 그의 자기이며 인성이다. 선택의 행위를 통해 그는 권력을 경험한다. 사실 선택은 그저 그의 등 뒤에서 일어나는 영향의 결과일 뿐이기에 무의식적으로는 무기력을 경험하지만 말이다. 의식적으로는 선택했다고 믿지만 사실 그는 자신에게 제시된 여러 제품 중 선택하도록 부추김당한 것이다.

 

p230

오늘날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갖고 싶은 것은 뭐든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 소비는 자유뿐 아니라 행복의 발판이기도 하며 자유와 행복을 가로막는 유일한 것은 소비하고 싶은 모든 것을 소비할 만큼 돈이 많지 않은 것이다.

 

p229

세상 안에 존재하며 세상에 자신을 내주고 삶의 행위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존재는 탐욕과 소유욕을 버릴 때만, 자신의 자아를 (중세의 의미건 데카르트의 의미건) 세상과 대립하는 고정불변의 고립된 에고로 생각하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 세상에서 그에게로 다가오는 것으로 완전히 채워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를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 자신으로 꽉 찬 인간은 마음을 열고 자신을 내줄 자유가 없다. 다시 한번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많이 존재하는 사람이다.

 

 

 

책모임: 2023. 02. 26.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이 글들이 쓰여진 시기를 가늠하고 놀랐다. 어제 발표했다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은데?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해도 역시 인간의 의식은 그 속도를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마음 속에 넘치는 것은 많은데 이걸 뭐라고 써야할지 모르겠는 기분.

아마 앞으로 살아가면서 종종 다시 꺼내 읽어볼 것 같고, 읽을 때마다 계속 새로 줄을 치게 될 것 같다. 

(이번에도 꽤 줄을 많이 쳤지만)

 

걱정되는 것 한 가지는, "책을 읽고서도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면 그 책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나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라는데,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과연 나는 달라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