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9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전두환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p17 현실을 현실 아닌 것으로 바꾸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눈가림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이 뛰..
p220 "잘 들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공포에 떨고 있어." p314 "미국에는 강꼬구징韓國人이나 조센징朝鮮人이라는 게 없었어. 왜 내가 남한 사람 아니면 북한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난 시애틀에서 태어났어. 우리 부모님은 조선이 분단되지 않았을 때 미국으로 갔고." p361 "일본은 절대 변하지 않아. 외국인을 절대 ..
p11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p20 선자가 열세 살이 되던 겨울날 훈이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훈이의 장례식에서 양진과 선자는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북받쳐서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젊은 미망인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일상으로 돌아가 여느 때처럼 일을 하기 시작했다. p105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없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단순히 주님을 흠모하거나 두려워하고, 주님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감정을 알아야 해.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실 게 분명하니까. 우리는 주님의 고뇌를 이해해야 하지.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겪으시네. 주님은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으시지. 그걸 아는 게 우리..
p23 "알다시피 사업계획서란 현실과의 첫만남에서 휴지조각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는 훈련 자체를 통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정신적인 안정감을 얻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알게 되는 거죠. 이 손잡이를 누르면 여기의 이것이 움직이고 저 손잡이를 누르면 저게 움직이는 거구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게 첫 단계죠." p62 똑똑함은 재능이고 친절함은 선택이죠. 재능을 얻는 건 쉽습니다. 그저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선택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의 재능에 현혹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재능이 선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p98 마틴 배런은 언제나 뉴스룸에서 더없이 중요한 점을 지적할 것입니다. "행정부는 우리와 전쟁 중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p127 어느 날, 라디오 방송에 게스트로 나갔을 때 "낯을 가립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돌연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것이 마치 병인 듯,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는 일처럼 말하는 스스로에게 약간 화가 났다. 그때까지 상대에게 사랑받고 싶다,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소통하기를 포기했다. 소통에 실패해 버리면 거기에서 인간관계를 배우고 성장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그걸 상대에게 "낯을 가려서......."라고 마치 피해자인 양 말하는 것은 "나는 소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인간이니 그쪽에서 조심하쇼."라고 대놓고 낯부끄러운 선언을 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몇 년 전부터 낯을 가린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마음의 문을 늘 활짝 열어 두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좋아한다고 알리고자..
p39 학력저하의 위기적 요소 중 하나는 앞서 설명했듯이, 아이들이 스스로 학력이 없다거나 영어단어를 모른다거나 논리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것을 조금은 자각하고 있어도 '그 사실을 특별히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나로서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 가지밖에 없다. 그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p53 문제는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나는 사는 사람입니다"하고 자신을 설정하면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어엿한 한 사람의 선수로 시장에 참가하도록 허락된다. 이 경험이 가져다주는 짜릿한 쾌감은 매우 중요하다. 어린 아이가 ..
p22 나는 사람들이 '국가'나 '국익'이라는 '큰 이야기'로 회수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영화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큰 이야기'(오른쪽이든 왼쪽이든)에 맞서 그 이야기를 상대화할 다양한 '작은 이야기'를 계속 내놓는 것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해왔다. 그 자세는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여기서 새삼 선언해두고 싶다. p23 작품에서 만든 이의 어떤 메시지를 수신해 그것을 확산하는 일이 자기네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정말이지 성가시다. 본인들은 대단히 진지하며 어쩌면 경향적으로는 나와 비슷한 사상과 신조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작품을 메시지를 옮겨 나르는 그릇으로만 보는 태도에서는 작품을 매개로 풍성한 커뮤니케이션이 확산되는 일은 아마 바..
p24 성인이 되어 두려움을 느끼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별로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겁이 날 일 자체가 별로 많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은 어떻게든 해결될 터이고 사소한 일에 몰두해봤자 부질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젊은 시절 끊임없는 집착과 두려움의 연속을 벗어나 넓은 시야를 갖추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이듦의 장점 중 하나다. 두려움에서 해방돼 나쁜 점이 하나 있다면 정말로 두려움을 느꼈을 때 이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철저히 체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읽은 날: 2021. 07. 10. 책모임: 2021. 08. 01. 파묻힌 거짓말의 다음 이야기! 음 시작부터 약간 충격적이었달까 그분이 그렇게 죽었을 줄은...! 끝까지 재미있게 읽었다. 두근두근 이런 느낌은 아니고 그래서 누군데? 누..
p540 많은 사람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영원하다고 믿고 산다. 엄청나게 끔찍한 일, 또 엄청나게 운이 좋은 일 같은 건 늘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나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종의 거짓된 안정감 속에서 지낸다. 엄청난 성공을 누릴 기회는 기꺼이 포기했으니 신과 악마, 둘 다와 합의를 이뤘다고 착각한다. 엄청난 부를 누리지도 못하겠지만 험난한 재판에 시달릴 일도 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한다. 바로 그때쯤 그런 합의가 우리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바로 눈앞에서 세상이 뒤바뀌고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그래서 더 위험해진다. 어둠은 칠흑 같은 암흑으로 변한다. 새하얀 눈과 같은 순백은 잿빛으로 변한다. 눈동자에서 죽음을 볼 때 심장을 ..
p16 이제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매달리는 걸 그만두고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을 생각할 때다. 완벽한 일터란 없다. 따라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보다 근원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에 있다. 결국 개인의 실천 습관이 우리 일의 완성도를 결정한다. 정확히 꼬집어 말하자면, 아이디어의 실현을 좌우하는 요소는 올바른 루틴의 보유 여부, 주도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역량, 그리고 업무 습관을 체계적으로 최적화하는 능력이다. p74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걷기 같은 매우 자동적인 행위를 할 때만 멀티태스킹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 의식적인 집중을 요하는 행위인 경우, 실제 이루어지는 현상은 멀티태스킹이 아니라 서로 다른 요구 사항을 놓고 마음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작업 전환' 과정일 뿐이다. 마치 두 가지 이상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