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25 생명체는 더 완벽하고 완전하게 성장할 수는 있어도 자기 안에 담기지 않은 것으로 자라날 수는 없다. p26 사과나무는 절대 벚나무가 될 수 없지만, 사과나무나 벚나무는 타고난 체질과 환경에 따라 멋진 나무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나무한테는 축복인 습기와 햇볕이 다른 나무를 죽일 수도 있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p28 삶을 사랑하건, 다른 사람이나 동물, 꽃을 사랑하건 모든 종류의 사랑에 적용되는 기본 원칙이 있다. 내 사랑이 적절하고 상대의 욕망과 본성에 맞을 때만 나는 사랑할 수 있다. 적은 물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라면 그 식물에 대한 사랑은 필요한 만큼만 물을 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식물에 무엇이 좋은지'에 관련된 선입견이 있다면, 가령 최대한 물을 많이 주는 것이 모든 식물에..

p18 "언니, 결혼생활은 어때요?" "굴욕적이야." 친한 후배가 물어왔을 때 그렇게 대답한 열다섯번째 여자는 놀라고 말았다. 반사적인 대답일 뿐이었는데 그 대답을 곱씹으니 불명확했던 감정들이 갑자기 명확해졌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굴욕적이야. 내 시간, 내 에너지, 내 결정을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아. 인생의 소유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 기분이야." "하지만 형부가 잘해주잖아요? 좋아 보였는데." "남편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 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했지." "당위로요?" "응. 갑자기 모두가 나에게 '해야 한다'로 끝나는 말들을 해. 성인이 되고 나서 그런 말 듣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대뜸 다시..

p61 '함께 모여 자신의 느낌을 공유하는' 본래 의미로서의 상식을 계속 현재 시제로 유지하려면, 상상하지 말고 관찰해야 한다. p95 그러나 정보는 채워져도 경험은 채워질 수 없어서, 책을 아무리 읽어도 실전은 또 다른 문제다. p176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어떤 힌트를 얻는지는 관찰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더욱이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의 자아가 아니라 N개의 자아가 있다. 어느 남성은 남편이자 아이 아빠이고, 회사의 직원이며 누군가의 친구이기도 하다. 어떤 여성은 다이어트를 위해 끼니를 거르다가, 다음 날에는 친구들과 피맥 파티를 한다. 따라서 한 명을 한 가지로 분류할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상황마다 다르게 분류해야 한다. 그 N개의 자아를 건드릴 때 사람들의 욕망을 정확히 끌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p14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운명론이거나 정해진 결과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선호하고,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모둠살이가 숙명인 인간종의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원하는 지점, 각자의 욕망이 합의되는 지점, 바로 그곳에서 일어날 일은 일어납니다. p15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모두에게 균등하게 온 것은 아니다." (...) 아직 내게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다른 이에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라면, 언젠가 나에게도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p78 기억해야 할 변화의 상수 3가지: 당신은 혼자 삽니다. 당신은 오래 삽니다. 당신 없이도 사람들은 잘 삽니다. p100 시스템이 바뀌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같은 변화 앞에서도 사람마다 수용성이 다릅니다. 서로..

p195 사실이라는 것은 기억하지 못해도 존재할 수 있다. 세상에는 나쁜 짓을 하면서 자기는 끝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한테 죄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니 순진하여 좋기는 하나, 남에게 폐를 끼친 사실은 아무리 순진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p233 그들 중 어떤 이는 때때로 나를 보며 고양이 팔자가 아주 편하겠다고 말하지만, 편한 게 좋다면 그렇게 하면 되지 않는가. 바쁘게 살라고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소화하지 못할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괴롭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불을 확확 피워놓고 덥다고 하는 것과 같다. p296 먼 옛날에 자연은 인간을 평등하게 제조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이라도 태어날 때는 반드시 벌거숭이다. 만약 인간의 본성이 평등에 만족한다면 그..

p56 사실 누군가에 대해 편견을 갖는 건 엄청나게 눈치를 보는 일이다. 한국인은 일본, 중국, 미국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반감이 크기 때문에 편견도 많고 눈치도 많이 본다. 여성혐오자만큼 여성이 뭘 입고 다니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눈여겨보는 이도 없고, 동성애 혐오자만큼 남이 누구와 어떤 체위로 사랑을 나누는지 따지는 이도 없다. 편협한 집단주의의 울타리에 갇혀서 타자에 대한 편견을 양산할수록 눈치를 많이 보고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p138 나의 자유는 결국 나의 일상적 퍼포먼스가 얼마나 해방적이냐에 달렸다. 그리고 그 퍼포먼스의 의미는 나의 의도가 아닌 사회문화적 구조가 정의한다. 아무리 자유로운 행위도 특권이라면 해방적이지 못하다. 면도와 채식은 그래서 내게 일맥상통한다. 매일 아침, 하루 세 ..

p29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생활 환경으로는 가혹하다는 의미입니다. 바다도 산도 숲도 강도 그것이 아름다울수록 일단 비위를 건드렸을 때에는 본색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혹독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그림 같은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p43 여하튼 나이만 먹어 가는 후반 인생을 시골에서 보내려면 그에 상응하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거의 야생동물의 최후 같은 죽음을, 말하자면 길에서 쓰러져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정도의 결의는 가져야 할 것입니다. p75 시골 행정 관계자는 대부분 환경문제에 둔감합니다. 요즘 들어서야 아주 그럴싸한 말을 하지만 마음속은 그 반대입니다. 위험을 약간 감수하더라도 돈이 들어오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이 본심일 것입니다. 위험한 공장이나 업자를 끌어들여..

p30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력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p81 나는 좋아하는 록 밴드의 새 음반이 나올 때마다 언니에게 강제로 들려주며 "좋지? 좋지?"를 연발하곤 했다. 그러면 음악 취향이 나와 사뭇 다른 언니는 마지못해 몇 초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좋네" 짧게 한마디하며 수긍해주곤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몰상식한 짓을 몇 년이..

p10 삶이 그토록 고단한 것이니, 사람에 대한 예의는 타인의 삶이 쉬울 거라고 함부로 예단하지 않는 데 있다. 오스트리아의 문학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p11 삶이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데 있다. 타인과 함께하지 않고는 의식주 어느 것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이 사회에서 책임 있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가능한 한 무임승차가 되지 않으면서 ..

p84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p118 기억력이 나쁜 사람은 조금이라도 좋았던 일은 모조리 적어둘 필요가 있다. 인생에서 아름다웠던 일은 오직 기억하고 있는 것들 뿐이니까. p155 취향이 마이너한 건 죄가 아니다. 다만 그 취향의 결과물이 인기가 없는 건 알아서 감수해야 한다. 순전히 자기가 좋아 시작한 짓이니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는 수밖에. 만약 운이 좋아 그 취향이 더 많은 사람의 방향과 맞아 떨어져 같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크게 가슴 아파할 건 없다. 이미 충분히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p174 앞으로 몇 해나 파도를 타러 다닐 수 있을까? 십 년은 가능할까? 십 년이면 육십이 넘는데 그땐 또 뭐가 발목을 잡을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