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6 사실 누군가에 대해 편견을 갖는 건 엄청나게 눈치를 보는 일이다. 한국인은 일본, 중국, 미국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반감이 크기 때문에 편견도 많고 눈치도 많이 본다. 여성혐오자만큼 여성이 뭘 입고 다니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눈여겨보는 이도 없고, 동성애 혐오자만큼 남이 누구와 어떤 체위로 사랑을 나누는지 따지는 이도 없다. 편협한 집단주의의 울타리에 갇혀서 타자에 대한 편견을 양산할수록 눈치를 많이 보고 그만큼 자유롭지 못하다. p138 나의 자유는 결국 나의 일상적 퍼포먼스가 얼마나 해방적이냐에 달렸다. 그리고 그 퍼포먼스의 의미는 나의 의도가 아닌 사회문화적 구조가 정의한다. 아무리 자유로운 행위도 특권이라면 해방적이지 못하다. 면도와 채식은 그래서 내게 일맥상통한다. 매일 아침, 하루 세 ..
p29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생활 환경으로는 가혹하다는 의미입니다. 바다도 산도 숲도 강도 그것이 아름다울수록 일단 비위를 건드렸을 때에는 본색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혹독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그림 같은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p43 여하튼 나이만 먹어 가는 후반 인생을 시골에서 보내려면 그에 상응하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거의 야생동물의 최후 같은 죽음을, 말하자면 길에서 쓰러져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정도의 결의는 가져야 할 것입니다. p75 시골 행정 관계자는 대부분 환경문제에 둔감합니다. 요즘 들어서야 아주 그럴싸한 말을 하지만 마음속은 그 반대입니다. 위험을 약간 감수하더라도 돈이 들어오면 그걸로 족하다는 것이 본심일 것입니다. 위험한 공장이나 업자를 끌어들여..
어떤 특정한 날 혹은 특정한 나이가 된다고 해서 갑자기 삶이 급변하는 건 아니지만, 그제 같은 어제와 어제 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 같을 내일 그냥 그렇고 그럴 날들 중에 조금 다른 날을 만들 수 있는 계기는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매 순간 매번 하게 되는 어떤 선택이 돌이켜봤을때 내 삶에 다른 길을 내주었더라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새해 같은 날은 내가 의식적으로 새로운 길로 방향을 틀 수 있는 날이 아닐까 하고. 이상하게도 어떤 결심을 적어버리고 나면 바로 그 다음 순간부터 어쩐지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되어버리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새해에 하고 싶은 일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해마다 올해에는 꼭 읽어야지 마음먹는 책이 있는데, 역시 그래서 안 읽게 되는 걸까? 그렇지만 올해..
p30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력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p81 나는 좋아하는 록 밴드의 새 음반이 나올 때마다 언니에게 강제로 들려주며 "좋지? 좋지?"를 연발하곤 했다. 그러면 음악 취향이 나와 사뭇 다른 언니는 마지못해 몇 초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좋네" 짧게 한마디하며 수긍해주곤 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몰상식한 짓을 몇 년이..
p10 삶이 그토록 고단한 것이니, 사람에 대한 예의는 타인의 삶이 쉬울 거라고 함부로 예단하지 않는 데 있다. 오스트리아의 문학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p11 삶이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데 있다. 타인과 함께하지 않고는 의식주 어느 것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이 사회에서 책임 있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가능한 한 무임승차가 되지 않으면서 ..
p84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p118 기억력이 나쁜 사람은 조금이라도 좋았던 일은 모조리 적어둘 필요가 있다. 인생에서 아름다웠던 일은 오직 기억하고 있는 것들 뿐이니까. p155 취향이 마이너한 건 죄가 아니다. 다만 그 취향의 결과물이 인기가 없는 건 알아서 감수해야 한다. 순전히 자기가 좋아 시작한 짓이니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는 수밖에. 만약 운이 좋아 그 취향이 더 많은 사람의 방향과 맞아 떨어져 같이 공감하고 즐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크게 가슴 아파할 건 없다. 이미 충분히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p174 앞으로 몇 해나 파도를 타러 다닐 수 있을까? 십 년은 가능할까? 십 년이면 육십이 넘는데 그땐 또 뭐가 발목을 잡을지 알 수 없다...
p9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전두환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p17 현실을 현실 아닌 것으로 바꾸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눈가림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이 뛰..
p220 "잘 들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공포에 떨고 있어." p314 "미국에는 강꼬구징韓國人이나 조센징朝鮮人이라는 게 없었어. 왜 내가 남한 사람 아니면 북한 사람이 돼야 하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난 시애틀에서 태어났어. 우리 부모님은 조선이 분단되지 않았을 때 미국으로 갔고." p361 "일본은 절대 변하지 않아. 외국인을 절대 ..
p11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p20 선자가 열세 살이 되던 겨울날 훈이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훈이의 장례식에서 양진과 선자는 억누를 수 없는 슬픔이 북받쳐서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젊은 미망인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일상으로 돌아가 여느 때처럼 일을 하기 시작했다. p105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없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단순히 주님을 흠모하거나 두려워하고, 주님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감정을 알아야 해.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실 게 분명하니까. 우리는 주님의 고뇌를 이해해야 하지.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겪으시네. 주님은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으시지. 그걸 아는 게 우리..
p23 "알다시피 사업계획서란 현실과의 첫만남에서 휴지조각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계획을 세우는 훈련 자체를 통해 문제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그 과정에서 일종의 정신적인 안정감을 얻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알게 되는 거죠. 이 손잡이를 누르면 여기의 이것이 움직이고 저 손잡이를 누르면 저게 움직이는 거구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게 첫 단계죠." p62 똑똑함은 재능이고 친절함은 선택이죠. 재능을 얻는 건 쉽습니다. 그저 주어지는 것이니까요. 선택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의 재능에 현혹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재능이 선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p98 마틴 배런은 언제나 뉴스룸에서 더없이 중요한 점을 지적할 것입니다. "행정부는 우리와 전쟁 중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